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스터 A. 아서 (문단 편집) === 대통령이 되기까지 === 1829년 [[버몬트]] 주의 [[캐나다계 미국인]] 가정에서 태어났다.[* 이 점은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뒤 의혹을 사게 된다. 헌법상 미국 국내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데, 캐나다 시민권자 부부가 캐나다 국경 건너편의 마을에서 [[출생신고]]를 한 것이 혹시 위조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.] [[1848년]] [[뉴욕]] 유니언대학을 졸업하고 [[1851년]]부터 이듬해까지 강의를 했으며 1854년에 [[변호사]] 시험에 합격한 후 뉴욕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. 변호사로 재직하던 당시 쟁점이 되었던 [[노예]] 문제에서 폐지론을 주장했던 인물로, 당시 백인 전용차에서 흑인 여성을 강제로 내리게 한 브루클린 전차 회사를 기소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인종 차별이 없는 [[대중교통]]제도를 도입하는 데 노력했다. 이런 성과로 뛰어난 변호사로 명성을 얻어 [[공화당(미국)|공화당]]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했으며 당시 공화당 최대 파벌의 영수격인 로스코 콩클링 계파에 속했다. [[율리시스 S. 그랜트]] 행정부 시절에 마침내 뉴욕항 관세징수관에 임명되었다. 이 직책은 당시 뉴욕에서 제일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 갖는 권한이었는데, 그 후임인 [[러더퍼드 B. 헤이스]]가 대통령이 되자 부패혐의로 해임되었다. 뇌물을 먹기는 했지만 이 조치는 당시 헤이스가 당내 최대 파벌인 콩클링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비쳐졌다고 한다.[*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"그에게 그정도는 당연하게 여겨졌을거다." 라는 설명과 함께 아서가 "요즘 세상에 나만 돈먹었나 그까짓 가지고..." 라는 대사 첨가했다.] 이후 [[제임스 A. 가필드]]가 18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 계파 실세인 콩클링과 가필드의 정치적 타협으로 콩클링 계파의 아서가 [[미국 부통령|부통령]] 후보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다. 그런데 사실 콩클링은 부통령 후보로 세우는 것을 탐탁찮아했다. 맨 먼저 가필드가 콩클링파였던 [[리바이 P. 모턴]]을 지명했을 때, 콩클링은 모턴을 직접 찾아가 거절을 권유했고 모턴은 실제로 사양했다. 가필드가 다시 콩클링파의 아서를 선택하자, 콩클링은 이번에도 아서를 찾아가 거절을 권유했지만 아서는 거절하지 않았다. 그 자리에 있었다는 언론인 윌리엄 C. 허드슨의 증언으로는, 아서는 "부통령직은 내가 꿈꾸었던 가장 큰 영예입니다"라면서 콩클링과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